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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얼준 목사와 평화의 집 보육원 소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1-28 16:13
조회
469
 

 왜 나같은 사람을 사랑해주셨나요 ! 


  “영리하고 속 깊은 소년” 얼준 둥겔 씨는 네팔 자낙푸르 출신으로 카스트는 상위권에 속해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농업 가정의 4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 항상 할아버지의 가슴에 엎드려 잤을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숨지실 때도 그는 할아버지 가슴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랑 때문인지 그는 영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일례로 초등학교 다니던 여덟아홉 살 때 방앗간에 부모님 심부름을 가면, 심부름 값으로 받은 1, 2루피로 사탕을 산 뒤 그것을 학교 아이들에게 팔아, 그 돈으로 학용품을 조달하고 학교생활 내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았다고 한다.


 리더십이 있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회 간부로 뽑혔으며, 당시 정치인을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하는 활동들도 하였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고교 졸업 후에는 야당 당수의 비서관으로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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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한국은 더 좋은 미래를 위한 기회였기에, 얼준 씨는 22 살되던 1994년 한국에 왔다. 그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이 미등록 체류자였고, 그도 얼마 안 있어 연수생으로 온 회사를 그만두고 인천, 마석에 이어 동두천 기와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기와 공장에서 일할 때 사장님은 그가 일을 잘 했다고 칭찬하며 그에게만 따로 상여금을 주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사양하고 모두에게 똑 같이 나눠서 지급해 달라고 할 정도로 의리가 있었다.



“ 오토바이 사고와 수술, 또 수술 ”


 1998년, 4년이 됐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했을 때, 사장님은 얼준 둥겔 씨에게 일을 잘 하니 조금 더 있으라고 권했고, 그도 더 남아있기로 하였다. 그 때 다른 친구는 예정대로 귀국하게 되어 송별회를 가졌다. 떠나는 친구와 헤어지기 아쉬워 2차를 가기로 하고, 친구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리고 삼거리에서 마주 오는 자동차와 정면충돌,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다. 헬멧이 없었으면 사망할 수도 있었을 대형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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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자체는 마주 오는 차의 과실이었지만 얼준 씨는 치료비 전액을 부담해야 했다. 돈이 없던 그는 집에서 오는 돈을 기다리느라 수술이 늦어졌고, 그의 투병생활은 지루하리만치 길어졌다.


첫 번째 수술을 하고나서 머물 곳이 없던 그는 희년선교회 쉼터를 찾아오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6년에 걸쳐 열한 차례 받은 수술 기록이다.


1차 동두천 정형외과 대퇴골 접합 수술


2차 같은 병원 재수술


3차 신길동 H병원에서 핀 뽑고 다른 핀으로 재수술


4차 이대동대문병원에서 원래 스타일 핀으로 재수술


5차 무릎인대 절단 발견, 이대목동병원에서 좌측인대수술


6차 세브란스병원에서 후방십자인대 수술


7차 세브란스병원에서 후방십자인대 재수술


8차 신장결석으로 신장결석제거술(그전에 외래로 세 차례 체외충격파 쇄석술 시행)


9차 세브란스병원에서 후방십자인대 재수술


10차 세브란스병원에서 무릎 연골 수술


11차 세브란스병원에서 절골술(반복된 수술로 2센티미터 짧아진 다리를 덜 절도록 시행)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적극적으로 모금도 해주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술하 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괴로운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큰 힘이 된 것은 일 선에서 도움을 주신 희년선교회 사역자들과 희년의료공제회를 통한 현대 기아자동차그룹의 공동모금회 기금, 그 뒤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수한 분들이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큰 자원이었 다.


 수없이 병원문을 드나들던 6년의 세월, 그는 선교회가 마련한 쉼터에 머물며 아침 예배와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 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가며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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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에 돌아가서 바뀐 삶 ”


 계속되는 수술에 그도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찾아간 그는, 더는 치료할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대퇴골은 진이 안 나와 접합이 안 된 채로, 무릎도 더 이상 수술할 수 없는 상태로, 그는 2003년 11월 네팔로 돌아갔다. 그는 한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의 수술로 약을 많이 쓴 결과인지 네팔에서 열병이 났을 때 약이 잘 듣지 않아 과량 투약하다 오른쪽 청신경을 잃었다. 그리고 무릎과 다리는 아직 많이 아프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가서 크게 느낀 것이 있다.


“무엇보다 희년을 알게 해준 친구 싸테가 제일 고맙습니다. 희년은 제 인생을 바꾼 곳이니까요.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나를 끊임없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앞으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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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하게도 그와 마음을 같이하는 크리스천 여성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의 아내는 지혜롭고 아름다우며 마침 가정교사 경력도 있다. 그는 2005년 1월 ‘평화의 집(Peace Children Home)’이라는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고아원은 카트만두 순환도로 외곽 스와이얌부 싸노 버렝 동네에 세워졌다. 얼준 씨가 초기에 돈을 모아 사둔 땅이 종자돈이 되었고, 선교회는 이 소식 을 듣고 고아원 운영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여 돕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 후원자들이 보내주 는 후원금으로 보육원이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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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에는 신분 제도인 카스트가 남아 있는데 ‘둥겔’ 이라는 성은 네팔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브라만 중에서도 최상위층에 속하는 카스트인데 사람들이 비천히 여기는, 고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누릴 특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 얼준 씨는 고아들의 아버지로서 필요한 것이 참 많다. 그러나 그의 인생 목표를 바꿔놓은 한국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그는 이후 교회도 개척하고 필요한 신학 수업을 마친 후 목사가 되어 카트만두에서 고아원 운영과 목회를 병행하고 있다.


 얼준 목사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한국에 돈 벌러 갔던 자신을 돌아보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여전히 가난과 깊은 영적 어두움에 잠겨있는 고향 가우리바스 (카트만두에서 승용차로 5시간 떨어진) 에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마을 주민들을 위한 여성문맹퇴치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센터를 세웠고 교회도 시작하게 되었다. 센터와 교회가 마을 사람들에게 장소와 기회를 제공함으로 여러 유익한 모임과 복음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 온 마을이 변화되는 그 날을 기대한다.


 한국에 왔던 한 네팔 청년을 고난 중에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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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에서 (201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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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경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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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창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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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교회 창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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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롭고 아름다우며 아이들 가정교사 경력도 있는 아내 데비 둥겔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온가족이 17명의 고아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